문화원 활동일지

남한산성 답사기

아포리 2011. 7. 27. 14:15

빛 좋은 초여름 피톤치트 가득한 남한산성 숲으로 들어가 본다.
남한산성은 옛날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곳...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었던 곳...
패배한 전쟁의 대표적이었던 곳...
내 마음속에 그동안 막연하게 받아들여온 남한산성이란 곳은
봄이면 새싹들의 보드라움이 좋았던 곳,
여름이면 솔 냄새의 향그러움이 좋았던 곳,
가을이면 빛깔 고운 단풍이 멋지게 좋았던 곳,
겨울이면 하얀 눈이 운치 있게 내려앉아 감히 경기도의 알프스라 불러도 좋았던 곳,
그래서 그 곳 남한산성 길의 아름다움이 참으로 좋았던 곳...
오랫동안 수없이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면서 생각도 속절없었다.
오늘 나는 내가 가진 무지함 속에 준비 없이, 그리고 마음의 비장함도 없이
남한산성에 들지는 않았을까...반성도 해 보면서 첫 번째 일정인 남한산성행궁 도착.
해설가님의 여기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입니다로 시작하는 남한산성 행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행궁이란, 왕이 수도를 벗어나 있을 때 머무는 곳으로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행궁은 전국에 20여개소나 있었는데 그중에서 남한산성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추어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곳이란다.
병자호란 당신 인조 임금과 소현세자가 47일 동안 머물렀으며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임금이 능행길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길을 따라 남한행궁 오르는 길 오른편에 있는 침괘정에 들렀다. 침괘정은 창을 배게삼는다는 뜻이라는데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침괘정은 영조임금 27년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중수하여 침괘정이라 하였다고 하며, 이 일대는 백제 온조왕의 궁전터였다는 설도 있다. 침괘정 부근에 군기창고가 있어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렀다는 남한행궁 상궐에 도착하니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다행히 노현균 해설가님의 도움으로 남한행궁 상궐 내행전에 들어가 볼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내행전은 왕의 상방인 침전이 좌우에 각각 있고 중앙에 대청이 있는데, 내행전에 왕이 침전에 들 때는 어디로 드시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유는 임금의 안보를 위하였다고 하니 이제나 저제나 호란 때도 임금을 위한 신하들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임금의 내행전은 그리 크지 않음에 놀랍기도 했거니와 그 내행전 속에서의 인조임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하는 측은지심도 생겼다.
인조가 상궐에 머물 당시 추위에 떠는 군사들에게 자신의 갑옷과 이부자리를 모두 나누어 주어 왕도 옷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며 당시 추위가 너무 심해 왕이 상궐 마당에 거적을 깔고 추위가 물러가게 해달라고 울면서 천지신명께 빌고 나니 마당에 있던 느티나무에 까치가 날아왔다는 설이 있다고 하며 인조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 까치가 앉았던 느티나무가 고목으로 남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임금이 계시던 행궁의 내행전은 기둥이 둥글게 짜여져 있다는 설명과 내행전 바로 옆에 임금행차 시에 수행원과 신하들이 머물던 곳인 북행각을 보았다.
북행각의 건물 형태는 기둥이 네모기둥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건물기둥의 형태가 임금이 계시던 곳은 둥글고, 신하들이 거처하던 곳은 네모기둥이라 하였는데 왜 그런 건물형태가 되었는지는 설명을 잘 못 들었다.
그런 건물형태는 다시 찾아보고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당시 건물에 남행각도 있다는데 남행각보다는 북행각이 임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상궐 밑에 하궐은 지금 한창 재현복원 공사 중이었다.
행궁 상궐을 내려오며 미리 예약해 놓으신, 남한산성에서 산나물이 제일 맛있는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랬지...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주 근사한 정식으로 점심상을 대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옛 선조들의 어려웠던 흔적들을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지켜내야 할까 새삼 그것이 화두로 떠오른다
많은 답사객들이 한꺼번에 몰린 탓으로 미처 준비가 덜되었는지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일행과 하고 싶었지만 기다리다 그만두고, 다시 수어장대와 지화문을 향해 가면서 빙 둘러쳐진 산성에 대한 설명에 흥미진진하게  귀를 쫑긋거리면서 열심히 들었다.
산성을 쌓은 벽은  1타3구로 되어 있으며[1타3구란 가지런히 놓아진 벽돌 세 개에 한 개의 총안] 산성 벽에 뚫린 구멍이 총안이란 설명을 들었다. 총안은 총과 활을 쏘았던 곳이란 부연 설명과 함께 총안은 근총안과 원총안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총안을 살펴보니 총안의 각도가 각각 달리 만들어져 있어 새삼 과학적인 총안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그동안 남한산성에 총안에 대한 의미를 그저 멋스럽게만 느꼈는데, 그것이 총안이며 과학적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고 난 후에는 옛 선조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성을 따라 걸으며 암문을 보았다. 성인 1명이 몸을 숙여서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든 암문은 일명 비밀문이라고 한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된 작은 성문의 일종으로, 비밀스런 통로이기 때문에 성문보다 작고 암문의 내측에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워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다.
남한산성에 모두 16개가 남아 있는 암문의 설계구조는, 벽과 벽사이가 꺾여진 곳에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꺾여진 부분으로 인하여 암문의 실체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날쇠[서훈남]라는 실제인물이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소설가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상성」에서  서날쇠가 암문을 드나들며 청나라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오던 대목이 유독 머리에 맴돈다.
다시 암문을 나와 경기도지정유형문화재 1호라고 하는 수어장대를 오르다 수어장대 바로 밑에 있는 청량당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들었다.
조선 인조임금 시절 남한산성을 쌓을 때 축조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매사에 꼼꼼하고 충직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일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다보니 기일 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여 공사비가 바닥이 났다.
이에 “이회”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무리들이 “이회”가 공사비를 횡령하고 게으름을 피웠다고 밀고를 하여 “이회”는 공금을 횡령한 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공사자금을 마련하여 고향을 떠나 남한산성 현장으로 향하던 중 남편 “이회”의 사형소식을 듣고 말았다.
“이회”는 공사비를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형을 당하기 직전 최후 진술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죄가 없다. 만일 내가 결백하다면 내가 죽을 때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다.” 그런데 “이회”가 처형되는 순간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바위 위에 앉아 그의 처형장면을 지켜보았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다시 공사비 횡령에 대한 재수사가 벌어진 후 “이회”의 결백이 밝혀지며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당집을 세웠다. 이때 그의 부인과 소실도 이 사실을 알고 죽음으로 “이회”의 뒤를 따랐다 한다.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의 이름을 따서 당집을 청량당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억울한 죽음의 원혼을 달래주는 사당은 그 후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되어 무속인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발걸음이 잦았다고 한다. 요즘도 남몰래 치성을 드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며 청량당 담벽에 치성을 드린 촛불의 그을음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릴 때 쓰는 향이 군데군데 널려 있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나도 슬며시 기도발이 강하다는 청량당 앞에서 마음속에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되든 안 되든 둘 중에 하나겠지만.........

[경기도유형문화재1호 수어장대]
조선인조임금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중 하나로,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고 성 내부와 인근주변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수어장대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란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로 불렸으나 영조27년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있고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의 수어장대는 1896년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2년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수어장대에 대한 설명을 뒤로 하고 내려와 지화문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의 지화문은 남문이라고도 불리며 남한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고, 선조임금때 남문, 동문 등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한다.  정조3년에 성곽을 개축하면서 지화문이라 불렀다.

조선16대 인조임금이 병자호란 당시 45일간 머물면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며 청군에게 항전을 하다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고 세 번의 절을 했다는 삼전도의 치욕 적인 현장을 돌아보고 백제와 신라시대를 거쳐 조선 인조임금때 병자호란을 온몸으로 겪어낸 현장 남한산성은 우리 조상들의 한과 질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벽길을 따라 걸으면서 병자호란의 함성과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기행을 뒤로 하면서,
후세에 남겨진 우리가 병자호란의 힘겨웠던 조상들의 삶보다 지금 가볍게 보고 느꼈던 남한산성의 무게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지금  남한산성은 전체의 보수 재현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7월이면 모든 공사가 마무리 된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마무리 된 남한산성을 제대로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속설에 아는 것만 보인다는 우매함을 뒤집어,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생각 속에 그동안 역사를 잊고 오늘 현재에 안주하는 그런 생활을 탈피해, 좀더 세심하게 역사를 바로알고 역사를 제대로 알기로 다짐해 본다.

* 행궁 : 임금이 궁전을 벗어나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 임시궁궐

* 찾아본 행궁 :
남한행궁,화성행궁,온양행궁,월미도행궁,북한행궁,강화행궁,전주행궁,격포행궁
초수행궁,이천행궁,구원행궁,노량행궁,시흥행궁,과천행궁,사근평행궁,안양행궁
안산행궁,풍양행궁,청주행궁

남한산성 및 남한행궁 현장답사 계획을 기획 해 주신 군포문화원에 감사를 드리며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시며 군포문화원 문화해설 사들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알기 쉽고 재미있게 해설을 맡아 해 주신 경기문화재단 학예연구사 노현균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문화해설사  이 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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