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리의 방

모란동백의 노랫말을 쓴 "이제하 님"

아포리 2017. 5. 2. 21:08


 

◀ 그림이 빼곡한 자택에서(2002년).

문단에 친한 사람이 없다지만, 李祭夏씨 카페와 자택에 여성작가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申京淑(신경숙)·김형경, 詩人 黃仁淑(황인숙)·조은·조윤희 등 여러 작가들이 종종 李祭夏씨 집에 모인다. 기자도 2년 전 그의 생일 모임에 한 번 갔는데, 30여 명의 여성작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주로 얘기를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듣는 쪽이다.
 
  ―여성작가들과 친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나는 여자친구들이 많아요. 남자들은 「승진, 한턱 먹은 얘기, 한탕 할 얘기」 이 세 가지밖에 없어요. 나른하고 재미없지요. 여자들은 일상적인 사소한 얘기를 많이 해요. 나는 사회 돌아가는 걸 그들에게서 들어요. 내가 얘기를 들어줄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는지 편하게 얘기들 해요. 원래 비슷한 나이끼리의 남녀가 만나면 긴장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나에게 남의 얘기를 듣는 재능이 있나 봐요. 바깥 공기를 거기서 알지요』
    

환갑에 가수 데뷔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자신의 CD에 수록했다. 1998년이면 그가 환갑을 맞은 해이다.
 
  ―환갑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시다니 굉장한 일 아닌가요. 
  『애들 장난에 말려든 거야. 1980년대 중반부터 코드 열댓 개 익혀서 놀러가면 기타 치고 노래하곤 했어요. 내가 자주 가는 카페 「나무요일」에 오는 사람들이 내 환갑에 CD를 선물하자며 돈을 모았나 봐요.
 
  이미 만들어 놓은 몇 곡에다 부랴부랴 몇 개 더 만들어서 녹음한 거죠. 「나무요일」 주인의 친구인 「동물원」 멤버 유준열씨 녹음 스튜디오에서 댓바람에 만든 거죠. CD가 나온 뒤 10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콘서트도 했어요』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그때 주제가인 「빈 들판」을 그가 만들고 노래했다. 장난 삼아 흥얼거린 걸 녹음했다가 채보해서 노래를 만드는 정도라고 했다. 
  ―남들은 어렵게 해도 안 되는데 선생님은 「장난 삼아」, 「먹고살려고」 하면 다 되는 게 신기하네요. 
  『애들 장난에 말려들어 끼가 발동한 건데 뭐. 자꾸 또 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담배 끊고 몇 달 목소리 가다듬어야 하는데… 제도권에 직장이 없으니 뭐하면서 소일할까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노래도 만든 거지 뭐』
 
  「빈 들판」은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갖기 위해 500장을 만들었다가 「나무출판사」에서 제작하여 시집과 함께 발매했다. 지금까지 모두 1만5000장이 팔렸다. 그는 회갑 때 「질주」라는 작품집을 김채원·구효서·윤대녕·최승호·김혜순·황인숙·장석남·허수경·조은·이진명 작가 등으로부터 헌정받았다.
 
영화칼럼은 소설쓰기가 지겨워서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비디오를 모은다는 소문이 났는지 한국일보에서 영화칼럼을 쓰라고 하더군요. 소설보다 쓰기 쉬우니까 쓴 거죠. 3년 동안 매주 한 편씩 신문에 낸 걸 모아서 영화칼럼집을 두 권 냈죠』  
  충무로 지하상가에서 희귀영화 LD를 사서 본 다음 비디오로 복사를 한 게 1500개나 되었다. 1500개를 처분한 뒤 다시 모은 게 1300개에 이른다. 토요일이면 카페에서 영화감상회가 열리기도 한다.  
  1990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서울예술大, 명지大, 추계예술大를 거쳐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드라마 쓰기, 작가연구, 글쓰기 등을 가르친다. 대학 강의 역시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도예와 글자체 만드는 일에 도전 


 

李祭夏씨의 길손체. 폰트화를 추진하고 있다.

  요즘 그는 그림을 직접 그린 도자기를 구워 카페에서 팔고 있다.  
  『주방에 가마를 하나 설치했어요. 팔기도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고. 부채를 자꾸 그려 달라며 10만원을 갖고 온 사람이 있어서 부채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것도 다 먹고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하는 거지(웃음)』
 
  李祭夏씨는 1982년과 1994년에 개인전을 열었고, 1998년에는 詩人 김영태씨와 2인전을 개최했다. 올 9월쯤 카페를 전시회장처럼 꾸며 그림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일을 정말 많이 하시는데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재산(웃음)? 「마리안느」밖에 없지. 집도 없어요. 「마리안느」가 잘 되면 나도 사는 거고, 「마리안느」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고…. 그러니까 손님들 좀 많이 오라고 해요』 
  곧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도 하고, 토요명화 감상회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토요일이면 「마리안느」에서 그림 개인지도와 글쓰기 지도도 하고 있다.
 
  요즘 그는 또다시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댔다. 자신의 글씨를 인터넷에서 폰트화 하려는 작업이다. 李祭夏씨의 인터넷 아이디 「길손」을 따서 「길손체」로 명명한 글씨는 이미 북디자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1990년 초부터 50여 권의 북디자인을 하면서 길손체로 표지를 만들었다. 자신의 책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디자인하는 그는 하덕규·박인희씨의 시집 표지도 길손체로 장식했다.
 
  길손체가 일반으로부터 주목받은 것은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poowa.com)에 직접 쓴 연하장을 올리면서부터다. 글자가 예쁘다며 네티즌들로부터 폰트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현재 폰트화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인데, 한글의 경우 자음과 모음을 써서 조립한 게 아니라 2780자를 일일이 다 썼다.
 
  『자음과 모음을 기계적으로 조합하면 제대로 맛이 안 나서 고생스럽지만 다 썼어요. 한자는 3800字를 넣을 계획인데 현재 반 정도 썼습니다. 단순히 본문으로만 쓰려는 게 아니라 책 표지 등에 쓸 수 있는 題字用(제자용)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한 거죠. 몇몇 업체와 폰트화를 논의하고 있어요. 길손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서예전을 곧 열 계획입니다』
 
  李祭夏씨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폰트가 있지만 예쁜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철수 체」가 예쁘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 스트레스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문학병·예술병에 걸려 내 욕심만 추구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다 보니 정상적으로 거두어야 할 것을 못 거두었다는 회한이 있지요. 일종의 패배자일 수도 있죠.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죠. 하지만 자식으로서, 家長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못 한 게 안타깝죠. 돌이켜보면 이기적인 삶을 살았어요. 중학교 때 걸린 문학병 때문입니다』
 
  마리안느를 좋아하는 영원한 청춘

2000년에 발간한 「독충」은 15년 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인 작품집이다. 「문학동네」에서 소설전집 12권을 내기로 계약한 뒤 6권밖에 못 냈다고 한다.
 
  남성작가들은 다 서리맞았고, 1990년대에 잘 팔리던 여성작가들까지 책이 안 팔린다고 걱정했다. 
  ―책이 안 팔리면 소설가들은, 앞으로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독자가 없으면 문학은 죽어요. 네티즌들이 쓰는 말을 문학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요즘 애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다가갈 방법을 생각해야지요. 겪지 않은 세대에게 역사의 비극을 강조해도 소용없어요. 현대는 미래적인 환상과 비주얼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나라 문학은 심각한 강박관념에 몰려 있어요. 너무 어깨에 힘을 줍니다. 일본은 아주 디테일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제도권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하고 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혼자서 먹고살아야 하니 기운 차리고 살았지. 필사적으로 먹고살 짓을 했지』 
  ―결국 그게 삶의 에너지가 되었네요.
 
  『좋은 거지. 먹고살려고 하면 속이 편한데, 난 예술가입네 작가입네 화가입네 나서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나는 유한계급들을 안 믿어요. 살아 있는 동안 노력해서 먹고살아야죠』
 
  ―아웃사이더로 산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기분 좋지 뭐. 소속되고 편입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니. 가난했지만 유유자적했으니…』 
  문득 카페 이름을 왜 「마리안느」로 지었는지 궁금했다.
 
  『영국 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 이름에서 따왔어요. 롤링 스톤스의 리드보컬 믹 재거와 열애에 빠지며 섹스와 마약을 탐닉했었죠. 폐인이 된 후 재기하였을 때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허스키로 바뀌었어요. 삶과 목소리가 인상적이고 마리안느라는 이름이 어감이 좋았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내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를 했는데, 그 여주인공도 멋있어서 그렇게 정했죠』 
  허스키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그가 바로 「아직 청춘인 마리안느」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월간조선 2005  8월호]

 

또 한번 동백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노랫말을 쓴 이제하 시인이 직접

노랫말도 만들고, 노래도 한 모란동백

경상도 사투리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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