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달동에 있는 동래부원군 허백당 정난종 선생의 묘>
이곳 정난종 선생 묘역은 1987년 도문화재 115호로 지정이 되었다
묘역에 이르는 왼쪽에 재실 성달재를 지나 아늑하게 앉아있는 정난종 선생 음택 일가
묘역을 볼수 있다 현재 묘역은 동래정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100대 명당중에 한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래정씨 집안이 번창하게 된것은 그 초석을 놓은 사람이 바로 허백당 정난종 선생이시다
정난종 선생은 세조때 부터 성종에 이르기 까지 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시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순성좌리공신에 봉해 지셨다
특별히 황해도 관찰사로 계실적에 변방에 40리 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이 많이 줄었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신 분으로 명필로 조맹부체에 뛰어나 당대에 초서 예서에 능하셨다
양양 낙산사 종명, 고성 유점사 종명, 원각사지 비음, 고령부원군 신숙주 묘표 등등
지금도 여러곳에서 정난종 선생의 서체를 만날 볼수 있다.
속달동 정난종 선생의 묘는 역장으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100대 명당이라니....
문중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 제일 좋은 곳으로 가게 마련이라고 한다
문중에서는 역장이라는 말은 잘 안쓴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묘는 위에서 아래로 쓰임이 당연히 되어 있는데
이곳은 묘 쓰임이 위에서 아래의 개념이 아니라
앞쪽에서 뒤로의 개념으로 보면 될것 같다 큰 어른이 앞에서 끌어주고
후손은 뒤에 어른을 보고 따라오는 형식의 묘 형태가 앞과 뒤의 개념으로 보면 될것같다
정난종 선생의 묘표 덮개는 돌에 꼭지가 있고 구름이 휘돌아 용이 몸을 뒤틀고 있는 모습이
조선초기 석물의 아름다운 특징을 엿볼수 있으며 사대부 묘에는 문인석을 쌍으로 세우는
것은 보기드문 일인데 이곳은 문인석이 쌍으로 서 있는걸 보면
완산이씨가 먼저 돌아간 다음에 작은 문인석을 세우고 그뒤 선생께서 가신후에
큰 문인석을 세워 문인석이 쌍으로 세워저 있는것이 아닌가 추측을 하면서
살아생전 두분의 알콩달콩 부부금슬을 문인석을 쌍으로 세운 것에서 엿볼수 있지 않을까?
선생의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장명등,문인석,신도비 등이 있다
묘역 안에 있는 비각 세군데중의 아래 신도비는 선생의 신도비이고 두번째 비각은 신도비가 아니고
신도비는 종2품 이상에게만 세울수 있는 것으로 보아 큰 아들 정광보는 그 벼슬까지 오르지 못해
묘갈로 보면 되고 그다음 비각안에 있는 신도비는 영의정까지 지낸 둘째 정광필의 신도비다
둘째 정광필의 후손들에게서 많은 정승들이 나오고 대제학이 나옴을 볼수 있으며
조선조 명문가 10대 중에 동래정씨가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묘를 잘쓰면
조상탓 으로 돌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것 역시 역설적으로 생각해 본다
정난종 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 씀씀이는 자식 들에게 지어준 이름에서도 엿볼수 있다
아들 넷의 이름이 정광보, 정광필, 정광좌, 정광형 으로
이름 끝자를 따오면 "보필좌형"
이 뜻은 아들들이 임금과 백성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
행하라는 뜻이라 한다
묘역의 각각의 석물 해설을 곁들이면서 멀리서 오신 동래정씨 문중 분들에게
제대로된 해설을 해 드렸는지 몹시 황송했지만
문중에서 오신 분 모두 경청을 잘 해 주셨고 끝난후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 주셔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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