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문: 해미읍성의 정문으로 화강암 홍예문 정면3칸,측면2칸의 팔작지붕 단층 문루, 성문 내측의 인방석에는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각자가 크게 새겨져 있어 성종22년에 대대적으로 중수가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회화나무: 일명 호야나무라고도 불리며 수령은 3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다 한다>
<천주교 박해시 천주교인들 끌어다 형틀에 매어 곤장을 치는 모습.... 엘리사벳이 동생한테 곤장을 치는 모습인데 이건 좀 심하지 싶다 희란!! 아퍼도 참어>
<해미읍성 옥에 갇힌 천주교인 사실적으로 그려놓은 이곳에서 분노가.....>
<민속가옥: 조선시대 부농과 상인 및 말단관리 서리의 집 등 조선시대 민가 3채를 재현해 놓았다>
<지금도 베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볕이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옆에 베틀을 놓으시고 삼을 삼아 베틀에서 베를 직접 짜신다고 하시는데 상품 판매도 하신다고.....>
<천주교인 박대 하던 이곳에서 댕기 딴 총각이 응가를 하는 모습...이것만 해도 양반이지....>
해미읍성의 축성배경
이 성은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옮겨 쌓은 것이다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이며
이 성을 쌓도록 지시한 사람은 조선조 세번째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16년 서산태안지역을 돌아본 태종은
왜구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해미내상성을 축조하도록 지시한다.
성곽의 석축 돌에 청주, 충주, 상주, 제주, 연산, 공주, 부여, 서천 등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력이 전국에서 차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은 230여년간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의 군사중심지로서 군사권은 물론 내란방지 등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하는 격이 높은 성이었다.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
1416년 2월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이 셋째 아들 충녕대군과 함께 7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산 부석면 도비산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강무 기간동안 당시 덕산에 있던 병영을
해미로 옮기는 구상을 하여 1417년부터 충청지역 방어를 위한 해미읍성의 축조가 시작되는데,
이는 태종대왕이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실록 16년2월 도비산에서 몰이하고 돌아와 해미현에서 머물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근무
1579년[선조12년]10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579년 10월~1580년 7월[10개월]간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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