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봉미산 자락 남한강변에 있는 여주 신륵사를 다녀왔다. 신륵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면서 신성한 가람이 설곳이라고 일러주고는 홀연히 사라지자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 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원효대사는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절을 지을수 있었다 신륵사는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신력의 神과 제압의 뜻인 勒를 합처 신륵사라 하였다. 고려시대 때는 나옹선사가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 이색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 로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세종의 능인 영능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능의 원찰로 신륵사를 중건했다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의 아름다움이 여주 팔경으로 손색이 없다.
빈자일등(貧者一燈) 연등의 유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때 국왕등 많은 사람들이 등 공양을 하였다 이를 본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은 등을 밝힐 수 없어 한탄 하며 온종일 먹지도 않고 구걸하여 겨우 한푼을 주고 기름을 샀다. 기름가게 주인은 그 사연을 듣고 감동하여 두배의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기름을 사서 등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은 등불 때문에 부처님께서 주무시지 못할것을 염려하여 자정이 되어 등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다른 등은 모두 껐는데 아난은 입으로 바람내어 난타의 등을 끄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더 밝아저 새벽녘까지 더욱 밝게 빛났다 이는 비록 가난 하지만 착한 마음씨와 지극 정성으로 밝힌 등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그만두어라 아난아 그 등불은 가난한 여인이 간절한 정성으로 켠 것이어서 너의 힘으로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 그 여인은 지금은 비록 가난한 모습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어 수에등광여래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일러 빈자일등 이라고 한다. 부자의 만등보다 빈자의 한등이 낫다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신륵사(주지 세영스님)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에 참석하면서 주지 세영스님의 말씀이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화합을 하면 세상은 난타의 등불처럼 밝아 질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 오신날 법요식에 참석해 주신 신부님, 목사님 모두 감사한 마음이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나도 마음의 등불 한개 밝히고 왔다
군포 시니어 기자단 이 희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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